내 꿈은 할머니
김현주 스텔라.수필가
초가을 햇살만큼이나 뜨끔한 어깨통증 치료를 마치고 버스 정류장에 섰더니 등에는 배낭가방을, 옆으로는 작은 백을 멘 스무 명 남짓한 어르신들이 길을 건너오셨다.
버스가 도착하자마자 북적거리던 정류장이 금세 한산해지려는 차.
“아이고, 나한테 같이 타자고 안하고 혼자 가삣네. 저게 109번이었나 보네. 우짜노”
“여 있어라. 담에 115번 온다카네. 그거 타도 된다아이가. 내가 갈체줄게”
길 건너에 어르신들을 위한 문해 학교가 있나 싶었다. 내가 타야할 버스는 더 기다려야 할 참이어서 옆 반 친구의 도움을 받아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 어르신을 보며 이 영자 어르신이 생각났다.
올해 봄 학기부터 ‘노인 미술 지도자’과정을 시작했다. 아동미술학원을 오래도록 해서 굳이 수업을 받지 않아도 할 수 있는데 하는 자만심은 첫날 첫수업에서 깨져버렸다. 익숙하지 않은 왼손으로 그림을 그려보고(처음 그림을 접하는 어르신 체험으로)역할극으로 그 그림을 설명하면서 쉽지 않은 길을 택했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수업과정에서 대상자 어르신을 한 분 정해서 ‘자기 회상 수업’과 ‘매체수업’을 진행하고 그 과정을 사진과 글로 남기고 마지막 날에는 발표를 하게 되었다. 발표보다 어려운 것이 20회 정도 되는 수업을 함께 할 어르신을 찾고 어떤 매체수업을 할지가 문제였다.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소개받은 대상자는 아흔이 되어서야 복지관에서 한글을 익힌 이 영자 어르신이었다. 강제징용 당한 아버지는 히로시마에서 돌아가시고, 전쟁 중에 어머니도 여의고 학교문턱은 밟아보지도 못하고 굴곡진 역사를 고스란히 받아들이셨는데 그 분에게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고 감사한 일 천지였다. 지점토를 밀어서 들꽃을 찍을 때는 아홉 살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했고 물감이 번지기만 해도 아이처럼 손뼉 치며 신나하셨다.
“선생남아 다음 수업은 언제고? 너무 재밌어서 할매 죽겠다”
내게 ‘할머니’는 오지 않을 미래라고 생각했다. 아흔이 되도록 한글을 모른 게 억울하지 않고 이제라도 배운 게 감사하고 신난 영자할머니가 ‘할머니’를 제대로 가르쳐 주셨다. 복지관의 수채화반에 들었는데 100세에는 전시회가 목표라고 하셨다. 내 꿈은 영자할매같은 할머니다.